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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신을 신다 2013/11/18 12:46
http://mylog.jesusfamily.kr/ksbong73/3171 
 

옥스퍼드 영영사전에서 ‘shoe’를 찾아보면 중간에 이 두 가지 숙어가 나온다.

 

사전은 “to be in, or imagine that you are in, another person’s situation, especially when it is an unpleasant or difficult one”이라고 뜻을 설명해 준다.

 

우리가 잘 아는 말로 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의미다. 영어(英語)의 사고에서 남의 ‘신발을 신는’다는 말은, 남이 처한 상황, 특별히 불편하고 어려운 처지 속으로 들어가는 노력이다.

 

설령 내가 그런 고통은 겪어 본 적 없지만 내가 그 사람의 상황에 속으로 들어가 보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그대가 역기능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비정규직이 아니어도, 필자의 신발을 신어보려고 하는 게 바로 이 의미다. 다른 말로 하면 필자를 ‘공감(共感, empathy)’하려는 태도다.

 

이 ‘공감’이라는 의미에서, 2011년 매일경제신문은 ‘분노의 시대를 넘어서’라는 특집 기사를 다루었다. 그 기사를 통해서 금융위기 후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분노를 막기 위한 몇 가지 방도를 제시했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공감 자본주의(Empathic Capitalism)’였다. 그러나 스펙 쌓기에만 혈안인 청년들과 은수저를 물로 태어난 재벌 3세들을 보면, 공감 자본주의는 아득히 멀어 보인다. 이 책은 한국의 경제적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필자가 읽은 책들 중에, 고재학 기자가 쓴 『절벽사회』는 그런 내용들이 잘 나와 있다.

한국의 청년들은 취업과 고시 합격만을 보고 달리는 경주마다. 좌우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질주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기업 정규직과 고시에 합격하면 자신들만의 기득권에만 집중한다. 재벌 3세들은 세상과 절연된 세상을 산 사람들이다. 창업주나 그들의 아버지와는 달리, 이미 차려진 밥상에 수전만 올린 셈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의 인재나 사회의 고위층들은 약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에 관한 관심이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지위와 현실에 상관없이, 그런 태도는 자승자박으로 다가올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승자독식의 사회다. 직장인들은 은퇴나 퇴사 후 맘 편하게 살아갈 준비가 부족하다.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사회다. 그렇다고 자칫 자영업을 했다가 망하면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게 현재의 한국 사회다. 재벌들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기업을 위협하는 가장 큰 리스크는 불매운동이다.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활동에 열심인 건 생존을 위한 이유도 있다.

필자가 과거에 보았던 TV 프로그램이 기억난다. 성우 양지운 씨의 능력을 재미있게 표현한 내용이었다. 방송국 녹음실 성우들이 영화 더빙을 위해 모였다. 양지운 씨가 다양한 인물들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보니 한 두 사람씩 잉여 성우들을 빼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주인공 한 사람만 남았는데 문제는 다수의 군중 소리가 필요할 때였다. 모두 가고 없는 자리에 혼자만의 목소리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었다. 1cm의 작은 자상을 꿰맸을 뿐인데, 몸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소우주인 우리 몸도 그런데, 우주라는 세상은 어떨까. 세상은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간다. 심지어 지식도 정보와 정보의 관계다. ‘관계’ 속에 살아가는 게 ‘인간(人間)’이다.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되는 게, 이웃이 처한 문제는 내게도 개연성 있는 문제다. ‘공감’이 필요한 건, 나도 살고 남도 살기 위해서다. 공감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공멸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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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문학 하는데 2013/11/18 12:43
http://mylog.jesusfamily.kr/ksbong73/3170 
 
도서관에 가면, 서가 한켠에 『○○○ 인문학』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꽂혀 있다. 서점에 가도 베스트셀러 분야 중에 인문학 책들이 많다. 그 책들 중 잘 나가는 인문학 서적의 목차만 인터넷에서 복사해서 붙여보니 A4지 4페이지 분량이다. 신화, 철학, 역사, 심리학, 예술 별로 다양한 인문학 지식들을 백과사전식으로 나열하였다. 얼핏 보기에 ‘한 권으로 읽는 인문학’ 느낌이다. 필자가 아는 내용도 있지만, 모르는 내용도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책을 쓴 필자는 무식해서 용감하다. 그 책 말고도 대학이나 언론사에서 선정한 ‘추천도서 100권’도 있다. 마크 C 헨리의 『인문학 스터디』는 문화, 예술, 철학, 정치, 역사학, 기독교 사상의 원전과 참고도서들을 소개했다.

이러다 보면, 인문학도 하나의 대학 입시 과목화(化) 되기 쉽고, 스펙 쌓기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인문학이 무엇이고, 왜 알아야 하는지, 인문학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 모르고 몰입하는 경우다. 책을 읽었다면 인문학이 ‘후마니타스’고 ‘문사철’이라는 걸 안다 할지 모른다. 고대·중세·근대·현대 철학을 논할 수 있고 문학과 역사와 예술 지식을 논할 수 있다. 그렇다 그것이 온전한 앎일 수는 없다.

 

학문적인 앎의 전개를 그리스 사람들의 전통에 따라 독일어로 ‘테오리(Theorie, 이론)’라고 한다. 그리스어 ‘테오리아(Theoria)’는 원래 ‘본다’라는 뜻에서 왔다. ‘관찰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오레인(theorein)인데, 이 말은 시선’을 의미하는 thea와 ‘보다’를 의미하는 horan이 결합된 말로서, 이로부터 ‘관찰자’를 의미하는 theoros, '관찰'을 의미하는 theoria 등의 단어들이 파생된다. ‘바라보다’ ‘주목하다’ ‘이해하다’ ‘판단하다’ ‘지각하다’ ‘체험하다’ 등을 의미하기도 하며, 나중에는 ‘특정한 범주의 사건을 해석하다’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또 성경에서 말하는 ‘앎’의 개념을 말할 때, 구약에서 ‘알다’는 과학적 의미는 거의 없다. 가장 흔한 히브리 동사 ‘야다’는 900회 이상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명사 ‘다아트’는 그 동사에서 파생되었고, 지혜와 거의 동의어이며, 지혜서에서 등장한다. 동사 ‘나칼’은 ‘알다, 분별하다, 깨닫다, 인정하다’를 의미한다.

 

그렇게 인문학 서적을 읽더라도 그저 백과사전식의 지식의 나열뿐 이라면,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필자는 솔직히 고대 그리스 철학 말고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문외한은 아니고 철학사와 근현대 철학자에 관련한 책들도 읽었다. 그러나 필자의 관심은 고대 그리스 철학, 좀더 나아가 중세 철학이다. 필자는 결코 그들의 철학이 결코 근현대 철학에 비해 저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의 사유는 시대를 넘은 통찰과 혜안이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도리어 근현대 철학자들이 버린 삶의 지혜나 초월적 사고는 귀한 보물이다.

인문학을 한다는 건 그 안의 관련 학문들의 지식을 안다는 게 아니다. 필자에게 있어 인문학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이고 ‘세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문학은 세계관에 대한 것이며, 세계관은 인문학의 바탕이자 열매이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게 바로 ‘세계관’이다.

생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문학은 세계관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서 현인들의 세계관을 듣는다. 특히 철학은 세계관을 가장 잘 표현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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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을 짜라 2013/11/18 12:42
http://mylog.jesusfamily.kr/ksbong73/3169 
 

이 카테고리의 제목인󰡒관을 짜라󰡓는 문구를 보고 어떤 관()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만일 사람이 죽고 나서 들어가는 관()을 생각했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떠올린 관은널 관자를 생각한 것이다. 이 한자가 들어가는 말로 관곽(棺槨)과 관재(棺材)가 있다. ‘관을 짜라는 말에 화가 났다면 나보고 벌써 죽음을 준비하라건가로 들렸다는 의미다.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죽음이다. 알고보면, ‘동안’, ‘몸짱열풍도 속내는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몸부림이다.

피하려고 몸부림치다 생각지도 못할 때 만나는 게 또한 죽음이다. 죽음은 생전에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대상이다. 죽음은 요즘 불고 있는 인문학열풍과도 멀지 않다. 최진석 교수는 인문학적 통찰을 바로 죽음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일!“하고 경험되는 거라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명사가 갑자가 동사가 되어 자기에게 파고드는 경험. 이게 바로 인문학적 통찰이다. 그래서 죽음에 매달리지 말고 죽어가는 일을 응시하라고 권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었다. 따라서 필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자만, ‘이라는 말에서 사람이 죽는 을 떠올렸다 해도 이 책의 목적, 다루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한 셈이다.

하지만 안심하시라. 여기서 말하는 관은 사람이 죽어서 눕는 관()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관’()을 말한다. 관광(觀光), 관념(觀念), 관망(觀望), 관찰(觀察)이라고 할 때 들어가는 볼 관’()이다. 󰡒관을 짜라󰡓는 말은 죽을 때 눕는 관을 짜라고 겁을 주는 게 아니라 󰡒세계관을 짜라󰡓권하는 말이다. 물론 그 안에는 사생관(死生觀)’도 있다.

한편으로󰡒()을 짜라󰡓는 말은 동시에 󰡒()을 가져라󰡓라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굳이 관을 가지라고 하지 않고 관을 짜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은 완성품이 아니다. ()은 관()처럼 한 판 한 판이 짜맞추듯 이뤄진다. 죽을 때 눕는 관()이 밑판과 옆판과 덮개로 이루어져 있듯이 관()도 세 개의 판-세계판, 인간판, 인식판-으로 만들어진다. 관이 주는 혐오감과 달리 관이 주는 안락함이 있다. 의식을 통해 관에 누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항상 관()을 들고 다닐까. 대신 관()대신 관()으로도 관()이 주는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은 자동차의 에어백 같은 든든함이 있다. 고급 자동차를 보면 대개 에어백을 갖고 있다. 어떤 차들은 차 안에 7개 이상의 에어백을 갖고 있다. 이처럼 인간 내면에 잘 짜인 관()은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충격에서 보호하는 에어백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또한 호신술과 같다. 호신술은 타인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상대의 폭력을 제어하여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술로써 그와 같은 기술을 익혀 두면 유사시에 거의 반사적으로 기술을 발휘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평상시에 짜 놓은 관()이 유사시에 외부로부터 오는 환경적 충격으로부터 그대를 보호한다. 잠언의 말씀은 이 점을 증명한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언 4:6)

 

Do not forsake wisdom, and she will protect you; love her, and she will watch over you. (New International Version)

 

이처럼 지혜는 그대를 보호한다. 또한 지혜는 그대의 길을 인도한다. 지혜를 갖는다는 건 곧 관()을 갖는다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는다󰡓는 말은 󰡒각성(覺醒)󰡓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각성이라는 말은 󰡒진리를 깨달아 아는 성품이나 소질󰡓로 사전은 정의한다. 진리를 깨달아 아는 성품이나 소질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우리 안에 깨달아 알게 하는 성품이나 소질이 있을 때 가능하다. 당연히 그 성품이나 소질은 우리 안에 잘 짜인 관()으로부터 나온다. ‘각성과 비슷한 말로 통찰’(洞察)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인문학적 통찰이다. 인문적 통찰을 최진석 교수는 우리 앞에 등장하는 사태나 사건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 위에다 올려놓고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또한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종합적이며 근본적이며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능력에서 오며 욕망에서 온다.”고 한다. 그것은 사유에서가 아니라 이며. 달리 말해 이다.

 

, 이제 필자가 󰡒관을 짜라󰡓는 말의 뜻을 알았다. “()을 짜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사물을 보는 󰡐관점󰡑󰡐견해󰡑로써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을 갖으라는 말이다. 짧게 말하면 통찰력을 가지라는 말이다. 잠언은 이 관(지혜, )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한다고 말하며 영예와 장수까지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관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관도 호신술처럼 평상시 잘 갈고 닦아야 한다. 필자는 관을 잘 갈고 닦는 일. 그러니까 관을 짜는 길을 세 개의 판()을 짜는 단계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 밑판과 옆판과 위판으로 이루어졌듯이, ()도 바닥과 옆과 위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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