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족교회홈 | 클럽 | 마이로그 | 내 마이로그 | 랜덤마이로그 
h . o . p . e . 주 . 희 . 프로필 | 안부게시판
mind  
 
  전체보기 (64)
  Sharing ☆ (12)
  인도네샤 소식♡ (38)
  유익한 자료 ♧ (5)
-------------------------
  사진들 □ (9)
 태그
  더보기

블로그 최근덧글  
  유학생, 왕핑에게 인사해..
  [펌]인도네시아에서 전합..
  [펌]인도네시아에서 전합..
  [펌]인도네시아에서 전합..
  [펌]인도네시아에서 전합..
  [펌]인도네시아에서 전합..
  2009 예수가족 국제부 MT..
  [펌]인도네시아에서 전합..
  [펌]인도네시아에서 전합..
  [펌]인도네시아팀 일정 ..
다녀간마이로거  
  사람낚는 어부
  eznblue님의 마이로그
  hunhanna님의 마이로그
  dhmusic님의 마이로그
  dong0620님의 마이로그
  ilovetaddy님의 마이로그
  주님과 함께하는 삶
  .
  wooyoungeun님의 마이로..
  tebbungv님의 마이로그
이웃 마이로그  
 - cinayi님의 마이로그
 - Christus am Kreuz
 - youngmini82님의 마이로..
 - 사랑받아 행복한 딸
 - 아낌없이 주는 나무
 - jesuskjd님의 마이로그
 - 
 - chanchan14님의 마이로그
 - lydianmusic의 형재 형제..
 - lydianmusic의 형재 형제..
 - 진명&진서 이야기
 - 호경이의 마이로그
 - 고난의 신비를 알고자...
 - 동행
 - 김솔의 마이로그
 - cinta
 - 심효섭 마이로그
 - mobetter
 - Jesus Freak
 - ☆기대★
 - syw0910님의 마이로그
 - 샤론의 꽃 향기
 - 영화
 -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
 - 여리네 집
 - 인도네시아를 사랑하는 ..
 - semarang story
  today 14   |   total 39943
  6회 스크랩 되었습니다
  14명에게 이웃등록되었습니다
 
 
[펌] 세상이 감당치 못할 용기있는 자 2008/10/19 22:56
http://mylog.jesusfamily.kr/lordperfume/1349 
출처 블로그 : hjjong33
 

세상이 감당치 못할 용기있는 자

(행 4:13-20)

 

요즘에 제 주위에 되어지는 많은 일들이 부쩍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고 있음을 봅니다. TV매체를 통해서 들여오는 소식도, 긴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이하는 시점에, 들려오는 연계된 지인들의 부고의 소식들을 듣고, 죽음에 가까이 가있는듯한 말년을 살아가는 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마치 죽음이 모든 문제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지름길인양 여기고, 여기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게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다며 자살하고 싶은 젊은이에게, 살고 싶으나 아퍼서 살고 싶지 않다는 분들에게, 또는 인생의 고통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말그대로 ‘유혹적’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죽음’에 대한 정의는, 그저 고생스러운 인생을 마감하는 세상의 끝을 의미할 뿐, 진리인 성경이 말하는 깊은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신자들에게 있어 하늘나라의 생을 시작하는 관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정의는 죽음이후의 삶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전제를 동의해야 가능한 정의이지요.  만일 우리가 죽음이후에 삶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봅시다. “죽음이후에 영원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 믿으시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맘에 담읍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이들이 있다면, 알고 그러거나 모르고 그러는 두가지의 부류일 것입니다. 먼저는 죽음에 대하여 무지하여 그리 대답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초보운전자가 자신의 차에 뒤에 붙인 초보운전 표시에도 불구하고 조심하여 운전하기 보다 들이대며 운전하는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좌 우 뒤 모두를 볼 수 없서, 그저 앞만보고 죽어라 운전하는 모습은 과히 공포 그 자체입니다. 사고에 대한 염려에서 초월해야 운전이 된다는 선배의 충고에 사로잡혀 전혀 사고를 개의치 않고 운전하는 모습, 자유해 보이지만 정말 공포스럽습니다. 죽음이 정말 가까이 있는 듯합니다. (옛날의 운전교육: 군대 운전사수 부사수의 이야기)

 

이렇게, 죽음이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까짓 죽음… 당하지 뭐”하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무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지함과 무관하게, 죽음을 두렵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신자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입니까? 죽음에 대하여 세상이 가진 정의와는 다른 정의를 가진 그리스도인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의 본문은 이런 두 인물을 우리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던 중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킬 뿐 아니라, 수많은 개종자를 얻게되자, 유대지도자들에 의해 잡히게 되었고, 잡혔다가 감옥에서 끌려나와,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유대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위협하고 경고하며 삼가할 것을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도무지 예수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길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충실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잠시 생각해 봅시다. 결과가 어찌될지를 모르고 나서는 용기도 용기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찌될지를 알고도 나서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고등학교때 돈이 없어져 반 전체가 벌을 선 적이 있었습니다. 의리의 돌쇠였던 탓에 친구들을 단체벌에서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제가 그랬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용기였습니다-였나요? 하지만, 전 결과를 예측 못했습니다. 디지게 맞았습니다. 멍에서 피가 나도록. 이거 용기아닙니다. 객기입니다. 자신만을 드러내고 싶었던 객기였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계속하여 전하게 될 경우 그 결과가 어떠할 지를 알면서도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어찌될 것을 아시고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나님의 뜻대로 올라가신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부터 배웠던 용기를 그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

 

약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런 용기를 갖기 전, 예수께로 부터 이같은 용기를 배우기 전, 베드로를 잠시 살펴봅시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용기없었던 베드로의 모습을 기억하시나요? 예수님의 미리 경고하심-닭울기전 세번을 부인할 것이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실재로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였던 그였습니다.

 

누구보다 앞서고자 하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어보려는 인위적 의지적 제스쳐는 오래가지 않아 사라집니다. 베드로에게 있는 비교의식와 열등감은, 그로 하여금 취약한 자신의 약점을 가리우기 위해, 용기있게 먼저 앞서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습관적인 비교의식은 성경의 여러곳에 발견되어집니다. (막14:29) 다른 사람 다 주님을 버려도 자기는 안버린다며 다른 사람을 비교하며 꼭 걸고 넘어 가는 베드로였습니다. 솔직히 그가 더 낫고자 애쓰던 것은 실재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보다 열등하기에 이를 감추기 위해서 더 열을 내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내가 누구보다도 신앙안에 바로 서있는 사람이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정작 그 마음안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날 수 없다고, 그래서 나은 신앙을 해야한다는 열등감과 비교의식의 쓴뿌리에 용기를 근거를 내렸다면 넘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용기의 근거는 오직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대의 배경과 인품에 대하여 결혼할 용기를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결혼을 지키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근거해서 결혼하지 않는한 그 결혼을 안전하지 못합니다. (자매님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직 믿음안에서 구원함을 받았다는 것은 지식이나 이론이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개인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지고 받아들여지는 단계에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의 본질이 결여된 용기는 금방 식어져, 소극적인 신앙을 유지하기도 버겹게 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에, 그 자신의 습관적인 비교의식과 열등감은 그로 하여금 예수께로 부터 멀어지게 하였던 겁니다. 눅23장의 멀찍이 예수를 따르던 그가 오늘의 본문에서는 (행4장) 체포와 투옥과 연행과 위협과 경계와 함구령이라는 쉽세없는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은 진정한 용기의 소유자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실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변화이전 이후의 두 모습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봅니다.
믿음이 생겼기 때문에 용기가 생긴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해답입니다. 베드로의 맘안에 말씀을 심기게 하시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심을 통해, 돌이키게하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막14:72에는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다고 나오지요.

 

물론, 이또한 베드로가 의지적으로 스스로 한 일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눅22:32에 예수께서 밀까부르듯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해 기도했다고,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하십니다. 결국 베드로의 회복의 원인은 주님의 기도인 것임을 보게 됩니다. 말씀도 기억나게 하시고, 기도해주심을 통해 회개하게 하여 주시는, 주님의 주도적이고도 전적인 은혜가 객기의 베드로를 용기의 베드로로 만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은혜의 체험을 분명하고 깊이있게 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가 있게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갈릴리 바닷가에 살고 있던 평범하기 그지 없는 순박한 어부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아서, 고기잡는 일외에는 특별한 다른 재능도 없었고, 교육도 재대로 받지도 못하였습니다. 오죽하면, 산헤드린 공회의 사람들이 그들을 멸시하여 “학문없는 범인”으로 일견에 간주해버렸겠습니까. 그런 이들은 당대의 최고의 교육을 받아 지식의 최첨단을 달렸던 산헤드린 공회의의 사람들앞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전 1:27의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하신 말씀을 설명하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설명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눅 들 수 있는 상황임에도, 베드로와 요한은 이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권세있어 보이는 이들의 위협과 회유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일이 가능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베드로와 요한을 용기있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와 요한 편에서도 확신하는 근거가 있었음을 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길 “우리가 보고 듣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4:20)”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고, 사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모든 사실을 이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모두가 너무나 사실이었기에 말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것이고,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에 더욱 담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사실을 믿는 확신이야 말로 베드로와 요한의 용기의 원천이었습니다.
사실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실입니다. (어린 제 딸아이도 잘못하지 않은 내용으로 나무라면 너무나 억울해서 소리놓아 울며 “아니에요”라고 말할 줄 압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합니다.)

 

교회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 때인 중세기의 일입니다. 바젤에 살던 마틴이라는 믿음의 사람은 성경의 대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했던 당시의 교회의 권세가 두려워서 감히 그 깨달은 바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거나 주장하지를 못했지요. 대신에 그는 양피지에다 다음과 같이 적어 자기 거실벽의 벽돌하나를 빼어 숨겼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예수여. 저는 주님의 보혈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음을 압니다. 거룩하신 예수여.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바젤의 마틴이 써서 감추어둔 이 글은 약 200년 후에 발견되었답니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대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도 마틴이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발견한 이 마틴은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시인하셨는데. 왜 내가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나의 주님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드디어 이 마틴의 목숨을 건 결단의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뜻이 이 세상에 퍼졌고. 세상은 밝아지고 교회는 개혁을 일으켜 새롭게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입니다.

 

당신은 어느 쪽의 마틴처럼 살고 있습니까? .할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진리로서 말하려는 사람, 그가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말하는 이가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의 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께만 신경을 썼습니다. 집앞의 가게를 나가면서도 화장을 하는 여자분들, 양복을 입으시는 남자분들 폼생폼사를 몸소 실천하시는 분들의 머리속에 가득한 사람의 시선과 말.. 이제 신경 끕시다. (수련회에서 생긴일: 2시간화장)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그러하기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 확신을 가지고 뱀과 같은 신중함으로 위기를 모면키 위해 침묵하기보다 사자와 같은 담대함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이들앞에 설 수 있었지요. 그들이 친히 경험한 놀라운 복음의 영향력과 자신에게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또한도 이 복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절대적 당위와 의무감이 이들을 침묵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껏 용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용기라 함의 사전적 정의에는 다양한 해석들을 담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서 용기가 의미하는 바는, 확신과 대담함과 솔직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사람 앞에서 칭찬을 받을 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만한 것으로 인식되는 용기를 우리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욥기 27장 11절에 보면, “전능자의 뜻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욥이 친구들에게 그의 고난당함에 대한 비난을 변호하고 변론하는 31장의 내용 중에서 등장합니다. 여기서 숨기지 않는다 함은, 밝히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 앞에 자유함으로 기쁘고 즐겁게 말함을 의미하는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모든 이들 앞에서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개적 차원도 의미함을 볼 때, 신앙 안에 용기를 낸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는 기쁨이 되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일서 3장 21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으로 책망을 받을 것이 없는 자는 담대함, 곧 용기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어떻게 우리 안에 책망을 받을 것이 없겠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것을 용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결과에 대하여, 누구나 맞게 될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은, 오직 바른 동기와 방법과 과정에 최선을 다해여 살되, 나머지는 하나님게 맡겨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생에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여 살되, 나머지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용기있게, 복음에 담대하게 하며, 하나님을 확신하게 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의 두 구절을 잠시 묵상하여도 알 수 있는 사실은 담대함으로 표현되는 용기가 생기는 이유가 다름아닌,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임을 알 게 됩니다. 하나님에 서는 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음을 실체적으로 인식하며 이땅을 살아가는 것이 용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고 견고할수록,  죽음의 두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말한대로, 누구보다 앞서고자 하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어보려는 의지적 제스쳐는 오래가지 않아 사라집니다. 스스로가 생각할 길 내 자신이 누구보다도 신앙안에 바로 서있는 사람이라고 호언장담하지만, 하나님께 그 뿌리를 두지 못하였기에 진정한 용기가 되지 못함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인생에서의, 신앙에서의 용기의 근거가 종교개혁자 그토록 외쳤떤 오직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를 말씀과 기도로 회복시키시고 용기있는 자로 살게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시간에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참으로 용기있는 자가 되어,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면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 말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덧글(1297) | 엮인글쓰기(0)